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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해 '저벅저벅' 나가자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20-11-04 (수) 11:56 조회 : 15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인 아이가 온라인으로 개학을 맞았다. 그 덕에 아이가 집에서 수업할 때면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다. 가뜩이나 사춘기의 예민한 때를 지나는 아이이기에 집 청소를 할 때도 딸 스케줄에 맞춰서 해야 한다. 어느 날 딸 방 옆에 있는 화장실에는 수업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가 붙었다. 눈치를 보며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딸 방 옆을 지나는데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이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헨리 제임스는 현대 영미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로 구세계(유럽)와 신세계(미국)의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과 문명을 추구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미국인’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신세계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구세계를 대표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역경이 그의 삶을 망가트리고 겁주었기에, 혹시라도 적의 어린 운명을 깨울까 두려운 마음에 그는 자신의 여생을 눈에 띌 정도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건너가고 있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적의 어린 운명의 윽박지름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안다. 그런 운명과 되도록 마주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 이민자들이 걷는 길이야말로 살금살금 걸어가야 하는 살얼음판 위로 난 길이다. 내가 아니면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이 없기에, 자빠지면 안아 줄 고향의 흙과 풀이 없기에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잔혹한 운명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발뒤꿈치를 들고 지금까지 살그래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였던 고 장영희 교수는 헨리 제임스의 운명론을 삶으로 반박했다. 그녀는 대학교 2학년 때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마음을 정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그 다짐처럼 그녀의 발걸음은 먼발치서도 사람들이 알아챌 정도로 컸다. 어릴 때부터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 보조기까지 차고 정그렁 찌그덩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걸어온 인생을 돌아보며 그녀는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다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나쁜 운명이 깨어날까 봐 사뿐대며 걸어온 길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운명이든 마주하겠다는 용기를 낼 때다. 미래를 향한 소망과 자신감을 인생의 행진곡으로 삼고 밝은 미래를 향해 저벅저벅 당당하게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며 살아 보자!

<LA중앙일보 칼럼, 2020년 1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