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군(軍)에 입대해서 제일 힘들고 무서웠던 것 중의 하나가 총을 쏘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이 총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저는 분명히 함량미달의 군인이었습니다. 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은 항상 총을 쏠 때 눈을 감게 만들었고, 총알이 발사된 후에 인정사정 없이 뺨과 눈두덩을 강타하는 개머리판 덕분에 총을 쏘고 나면 항상 얼굴이 퉁퉁 붓곤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며칠 동안 머리 속에 남아서 윙윙거리는 매미 소리(?)였습니다. “총 안 쏘는 군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이등병 시절을 거의 다 보냈습니다. 덕분에 저에게 붙여진 별명은 “꼴통”이었습니다. “전투력 측정”(Attack Technique Test)이 있을 때면, 저는 항상 서류상으로 “병원 후송병” 처리가 되었습니다. 훈련에 참가하면, 저 같은 놈들은 점수를 까먹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항상 혼자 남아서 내무반 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대대장님이 “저 놈은 목사 밖에는 할 것이 없는 놈”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놈들 치고 쓸 만한 놈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했는데, 갑자기 가슴 속에서 “욱”하는 것이 치밀어 올라 왔습니다. 적성에 전혀 맞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할 군 생활이라면 악착같이 하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때마침, “삼군사격 대회”에 나아갈 저격병들을 모집하는 광고가 군의 게시판에 게재되었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대로, 제 의지도 스스로 시험할 겸 가차 없이 저격병에 지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장교들이 “가만히 안 있어. XX야!” 호통을 쳤지만, 제가 귀찮아서였는지, 대대장님이 저를 영원히 후송 보내는 마음으로 사격장 파송을 결정하셨습니다. 덕분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예비군 일개 대대가 쏠 수 있는 양의 총알을 혼자서 6개월 동안에 다 소모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머릿속에서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총을 쏠 대마다 들리는 강렬한 파열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후폭풍 때문에 뒤로 밀리면서 얼굴에 와 닿는 개머리판의 떨림이 이제는 부드럽고 좋았습니다. 나중에는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가는 총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득도(得道)한 것입니다.
삼군사격대회에서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입상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포상휴가를 갔습니다. 더 이상 고문관도 아니었고, 대대에서 총을 가장 잘 쏘는 특등사수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원하면 서울의 태능사격장으로 전출시켜 주겠다”는 말도 듣게 되었습니다. 군 생활 중에서 사격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졌습니다. 총을 쏘는 날은 항상 포상휴가를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쏴도 표적을 다 맞출 자신이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연습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 100%”라고 믿었던 것이 “절대 가능 100%”로 바뀐 군 생활 최고의 교훈이었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표적지에도 쉬지 않고 총질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몸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경건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표적이 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만 바라보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반드시 신앙의 왕도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히 12:2). 주님 만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삶을 통해 배우게 될 것입니다. ✍